김광현, 진화의 시작(을 기대하며)-

   세상에 태어나 눈을 뜬 이후 스포츠에 관심을 가져본 역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고)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한창 고대 VS 연대 대학 농구에 열광하며 ‘우지원과 결혼을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을 무렵에도 난 ‘어떻게 운동선수를 저렇게나 좋아할 수 있을까’하며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게 있어, 스포츠라는 것은 ‘굳이 쓸데없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하는 비효율적이고 깔끔하지 않은 것’ 정도로 인식되었다. 물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도 체육이었다. (지금은 수행평가라고 불리우는 실기시험 점수는 C로 점철되었다.)


  그러던 내게도 전환점이라는 것이 찾아 왔다. 작년 여름, 집 밖으로 나가기도 싫을 만큼 덥던 그 8월, 난 베이징 올림픽 중계를 하루 종일 보면서 즐겁게 여름을 보냈고(스포츠를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국대 경기는 재미있다. Plus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행운이리라-), 야구 대표팀의 예상 못한[?] 선전 때문에 야구 경기를 꽤나 많이 보게 되었고, 차츰 차츰 야구라는 것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대강이나마 알게 되었다. 한때 K가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주었어도, 경기장에 한두 번 가서 직접 경기를 봤어도 “Safe(세입!)”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던 내가(너무 심한가?;;) 중계를 반복해서 보다보니 조금씩 감을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 때만 해도 난 아직 ‘야구’라는 거대한 영역의 울타리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경계인이었다.
 
대반전이 일어난 것은 올해, 2009 WBC 이후였던 것 같다.


  이쯤에서 잠시 내 성격을 돌아보는 ‘삼천포 타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성격이 매우 급하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이지만, 이런 내 성격 저변의 근간은 “연민”이라는 한 단어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강하고 잘 나가는 분들에게는 무관심한 내가 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마음이 쓰인다는 것,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엄연한 사실인 것을 어쩌랴. (그나마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 보다는 100배 낫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이런 내가, WBC 때 ‘김광현’이라는 한 선수에게 관심이 쏠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그의 준수한 외모와 멋진 투구폼, 속마음이 그대로 들어나는 솔직담백한 표정 -비록 그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유리한 투수라는 직업에 있어서는 아킬레스건이라고 할지라도-, 화려한 삼진 실력도 한몫했지만 관심의 시작은 ‘연민’이었다. 참고로, 내가 현 프로야구 팀에서 제일 관심을 갖고 응원하는 팀은 ‘히어로즈’이다. 이유는 굳이 쓸 필요가 없을 듯-

  각설하고, 작년 여름,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가장 큰 공헌을 했으며(probably), 그 해 소속팀 SK의 한국시리즈 2연패 달성과 함께 본인은 골든글러브, MVP, 다승왕, 탈삼진 왕 등 온갖 화려한 상을 휩쓸며(그게 운이였건, 짜여진 각본이였건간에) 스타덤에 올랐던 김광현. 그 21세의 젊은 유망주, 앞날이 창창한 ‘일본 킬러’가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2009 WBC. (참고로 난 그 경기 장면은 수업 때문에 못 봤지만, 그 이후 이 선수에게 불어닥친 치명적인 여파는 충분히 느꼈다.) 모두가 김광현은 올림픽 때의 기억을 환기시켜주며 일본을 멋지게 제패할 거라고 기대했건만, 그 기대가 무색하게 김광현은 순식간에 추락했다. 대표팀이 WBC 2위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새로운 스타들의 탄생 속에서 금의환향할 때도 김광현의 웃는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못했다.


  WBC 열풍이 사라지고 나는 이따금 들리는 스포츠 뉴스에서 ‘김광현 2군행?’ 등의 머릿기사를 보면서 이런 추락도 있나 싶었다. 한때 신격화된 존재가 범인(凡人)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었다. 물론 그 때까지는 큰 관심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제대로된 야구룰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야구 중계를 보았고, 선발이 김광현이였다. 결국 2군행은 불발에 그쳤는지, 단 며칠만에 올라왔는지 그는 다시 1군 무대에서 선발로 출전을 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4월 즈음, 시즌이 막 시작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팀과의 경기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 화면에 잡힌 그의 얼굴, 아마 그게 내가 야구 ‘관람’에 발을 들이게 된 도화선이 아닐까 싶다. 올림픽 때 TV 화면 가득히 잡히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리고, 세상의 힘든 모든 것들이라고는 모를 만큼, 포수의 신호에 언제나 ‘아니오’보다는 ‘오케이’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담고 고개를 끄덕이던 해맑은 얼굴. 허나 그 날 내가 만난 얼굴은 작년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머리는 짧고, 피부는 스트레스의 탓인지 예전엔 안 보이던 트러블 자국이 가득했으며, 볼살이 사라졌고(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일단 무엇보다도 눈빛이 어두웠다. 내 ‘연민’에 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나는 김광현이라는 선수 개인 외에도 히어로즈라는 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야구경기를 보기 시작했고, 야구 룰을 하나하나 흡수해 나갔다. 이 와중에 놀라울 정도로 김광현은 재기에 성공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모 스포츠 기사에서 ‘빛을 던졌다’라고 표현했을 만큼(이 표현, 매우 적절했다) 멋진 피칭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 날을 제외하고는 내가 그의 선발 경기를 시청할 때마다 제구력이 흔들리는 듯 했다. 다행히 위기관리능력을 키웠고, 소화할 수 있는 투구 이닝이 길어져서 자책점은 낮은 편이었지만, 김광현의 선발 경기를 볼 때마다 난 불안했다. 큰 점수가 날 만한 위기 상황이 너무 많이 생겼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승 행진을 계속했다. (6월 초까지 그는 올 시즌 8연승으로 다승 공동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패가 분명해 보이는 경기도 팀 타선 지원 때문에 패로 기록되지 않는 경우가 이따금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운광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실력에 비해 결과가 좋다는 것을 질타하는 야구 팬들이 붙인 것이다. 거기다 승리를 위해 타 팀의 에이스는 피해 다닌다는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하지만 무패 행진은 어제, 6월 16일 히어로즈 전에서 끝났다. 그리고 ‘운광현’의 ‘운’도 끝났다. 아니, 오히려 운이 지지리 없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드디어 운이 바닥을 쳤다고도 할 수 있겠다.


  1회 초, 요즘 타력이 불을 뿜는 히어로즈 타자들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그는 한 이닝 동안 대략 35개에 달하는 공을 던져야 했고, 결국 3점이라는, 그로서는 어마어마한 점수를 내줘야 했다. 난 아무리 한 팀의 에이스라도 저런 기세가 계속 된다면 심리적으로 너무 위축되어 2, 3회 안에 강판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불운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회, 3회 ... 7회까지 김광현은 단 한 점도 더 내주지 않은 채 타자들을 들여보냈고, 한 이닝 당 투구 수는 10개 남짓. 이런 광경은 오히려 최근 그의 선발 경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심지어 해설가도 ‘평소보다 더 잘하는 것 같다’라는 얘기를 했다.) 결국 7회까지 던지고 3실점. 결국 퀄리티 스타트는 달성했고 히어로즈의 타선은 꽁꽁 묶여 버렸다.


  문제는 그 이후. 뒷문을 책임지기 위해 나온 이승호가 폭투하며(기록상 8회의 폭투;;) 3점을 더 줬고, SK의 타선은 결코 살아나지 못했다. 김광현은 더 이상 운에 기대지 못하게 된 것. 결국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던 이 날의 경기 결과, 히어로즈가 SK를 상대로 6:3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자, 그렇다면 김광현은 작년 8월 이후 계속 이어오던 13연승을 마감하고 패전투수가 되었으니 안타까워해야 할까? 글쎄, 선수 개인으로 본다면 밤잠 못 이룰 만큼 분하고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1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잘 던졌는데 타선의 협조를 얻지 못했고,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패전투수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10달 만에 첫 패)

 하지만 나는 어제의 히어로즈 전 첫 패가 그에게는 진화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운이 그의 화려한 실력을 가렸지만, 어제 비로소 그 법칙이 깨졌기 때문이고, 그건 분명히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김광현은 다시 비상을 꾀해야 할 일이다. WBC 이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속쓰림을 겪었을 그에게 필요한 건 그 어떤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 확실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혹자는 기껏 국제대회에서 한번 실패한 것으로 힘들다고 하냐며 비난을 서슴치 않지만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게다가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과거의 경험이 다른데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 또 그렇게 별거 아닌 일이였다면 WBC 이후 봇물처럼 쏟아진 비난 여론 역시 문제가 아닌가-) 물론 김광현 투수의 기본 실력이 대단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동안의 불안한 피칭에서 보여주었던 흔들리는 면모를 개선하고, 어제 2회 이후의 모습처럼(1회 3실점이라는 그 대재앙같은 위기 속에서 그렇게 잘 던지는 건 분명 운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고 실력이었다.) 위력적인 피칭을 이어간다면 분명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좌완투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나이, 이제 21세. 통산적으로 투수의 전성기 나이에 미치려면 한참 멀었다. 물론 너무 어린 나이에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 부담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나 이런저런 시련들을 통해 분명히 그는 진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결코 물렁물렁한 성격은 아닐 듯한 김광현. 자존심도 세고, 선수로서 필요한 정도로 승부욕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각광을 받다보니 쉽게 분석을 당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새로운 피칭을 개발하고 끊임없이 노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잘할 때는 열광하다가 한번 못하면 기다렸다는듯이 역적 취급을 하는 일부(대다수인가;)의 여론 놀음에 너무 장단을 맞춰서 흔들리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선수도 영원히 top이 될 수는 없으며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되 바닥이다 싶으면 오기를 가지고 탈출하는 굳은 마음가짐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김광현이 소싯적에 방황을 많이 했지만 오래오래 꾸준히 던져주고 있는 랜디 존슨을 닮아주었으면 좋겠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야구에 막 발을 들여놓은 초짜로서 우리나라 야구팬들의 지나친 열기는 간혹 부정적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는 게시판과 팀별로, 선수별로 많기도 많은 듣기 민망한 별명들, 잘하면 얄미워하고 못하면 마구 몰아치는 모습들은 아직 내게 너무 낯설다.)


  분명히 어제 히어로즈 경기는(난 히어로즈라는 팀과 김광현이라는 선수에게 모두 연민, 다시 말해 애정이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김광현 선수에게 있어서는 WBC 못지 않게 큰 의미를 가질만한 것이었다. 다소 혼란스러운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쉽게 떨쳐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주기를 바란다. 

  감독의 마음이겠지만 한 팀의 에이스로서 5선발 체제 하에 마운드에서 성실히 자신의 임무를 다해줄 김광현의 꿋꿋한 모습을 기대한다.
  가능하다면, 그의 진화는 이제 시작될 것이다. Impossible is nothing. 즉, 가능하리라.

by nature | 2009/06/17 20:46 | ♣ Artistic Minds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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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elody at 2009/06/19 01:41
어쩌다 우연히 검색해서 글을 읽다보니 저와 너무 비슷해서 놀랐네요ㅋ 광현선수를 눈여겨보게된 그리고 팬이된계기가 똑같아서요 ^0^ 저는 야구에대해 거의 매력을 느껴본적도 없는..그저 그냥 봐도 좀 지루하다 뭔가 매력이없는 스포츠가 야구였어요 특히 투수는 존재감조차 관심도 없는 그저 타자가 공을 치고 홈런을 날리고 하는경기라고 알만큼 관심이 없었어요 하지만 김광현선수가 마운드위에서 피칭하는 모습을 첨봤을떄 정말 저 선수 매력적이다 할만큼 시선을 끌더군요 그중에서도 다이나믹한 투구폼과 즐기는모습 아우라, 같은 그런것들이.. 특히 표정-훌륭한 투수가 되기위해선 무표정이 기본이다 하는것과는 너무 다르게 너무 솔직하다 할정도로 다양한 감정표현에 너무나 끌렸습니다 참 흥미롭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열혈 야구팬이 됐지만요 심지어 도서관에서 야구서적까지 빌려볼정도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우선 잘하기도 잘하지만 그 배짱이 보통선수는 아니구나 하는걸 한눈에도 알겠더라구요 wbc이후에 광현선수를 향한 여러 시각들과 반응들이 요즘은 좀 생각을 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한국야구에 금메달이라는 큰 선물과 결정적 운명과 같이한 어린선수가 wbc에선 많은사람의 기대에 못미쳤고 실망이라는 결과를 안겨준 그에게 많은 질책과 곱지않은 시선은 어쩌면 감내해야할 자신이 넘어야할 큰 벽이겠지요 하지만 때론 지켜보는 사람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도 힘들때가 많은 요즘인듯 싶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wbc이후 리그 첫 경기때 마운드위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못보겠더군요 그 여유롭고 자신감있는 표정은 어디갔는지...본인이 요즘 기사로 재기를 못할정도로 만신창이었다는것과 그때 자살하려고 했다는 표현까지 보니 정말 많이 심각했음을 알겠더군요 가능하다면 그 방황의 시기를 잘 넘겨갔으면 좋겠다는 바램 하나입니다 그리고 광현선수는 그럴수있는 훌륭한 투수라는 믿음도 있구요 웃음이 헤플 정도로 많은 선수지만 마음은 독한 선수가 되길...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광현선수에게 느낀 행복이라는 야구의 즐거움을 알려준 즐기는 모습을 언제나 간직하는 선수가 됐음 좋겠네요 광현이 화이팅! ㅋ글 잘읽고 가요..^-^
Commented by nature at 2009/06/19 13:02
melody 님/ :) 사람 마음이 다 거기서 거긴가봐요. 다른 분들 읽으라고 쓴 글은 아니고 그냥 혼자 생각했던 걸 끄적거린건데... 그래도 동감해주시는 분이 계시니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야구가 뭐가 재미있나 했던 1인으로서 저를 야구의 재미, 감동, 온갖 지략의 세계로 풍덩 빠지게 해 준 것만으로도 김광현 선수에게 감사하죠. 그런 힘이 있는 것 만으로도 참 대단하다 싶어요- 아무튼 지금 이 힘든 시기를 멋지게 헤쳐나가길, 그래서 오래오래 야구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바래요. ^_^ melody 님도 저도 같이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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